촛대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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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성경 예언이 이 사건을 취급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은 외관상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일어난 무산 계급의 혁명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무신론 사상을 유포시키고 공산주의를 태동하게 한 기틀을 마련해 소련과 동유럽 그리고 중국의 수십억 인구를 공산주의와 무신론의 틀 속에 가두어서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큰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프랑스는 종교 개혁을 거부하고 부패와 타락이 극도에 달했다. 성직자들은 귀족 계급이 되어 온갖 사치와 향락를 누렸으며 일반 백성들은 압제에 눌려 신음하고 하루 먹을 빵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촛대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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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0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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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단의 과정 잘 통과하는 성숙한 신앙인 되길 본문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주의 날에 본 일곱별을 손에 잡으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왕래하시는 예수님의 환상입니다. 여기서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입니다. 교회가 촛대로 묘사된 것은 비단 본문만이 아니고 출25:31-40과 슥4:1-14에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성경은 교회를 촛대의 모습으로 보여주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 금 촛대의 기능이나 특성이 교회의 기능이나 특성과 가장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들에서 우리는 참 교회 또는 참 신자의 기본적인 사명은 무엇이며 또 어떤 특성들을 가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1. 참 교회 또는 참 신자의 기본적인 사명

      본문에서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고 했는데 왜 교회가 촛대로 비유 되었을까요? 촛대는 빛을 비추기 위한 도구입니다. 이 환상은 교회의 기본적인 사명이 빛을 비추는 일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사60:1-3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그러면 교화와 신자들이 세상을 향해 비춰야 할 빛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빛이기 때문입니다.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둘째, 성경은 또한 예수님을 가리켜 빛이라고 합니다. 요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에 빛을 비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또는 예수를 전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사명은 곧 주님의 지상 명령인 복음전파입니다. 따라서 교회나 신자의 참 모습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불이 꺼진 촛대와 같이 죽은 교회요 죽은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전하는 일이 왜 빛을 비추는 일로 묘사가 됐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인데 어두움이 있는 곳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첫째, 무지가 있습니다. 즉 어두우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입니다(요1:5) 하나님도 모르고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도 모릅니다. 그런데 복음은 바로 이런 무지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주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공포가 있습니다. 우리가 캄캄한 곳에 있으면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이 세상 사람들은 죄의 어두움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런 자들을 그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서 참 기쁨과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셋째, 죽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태양 없는 이 세상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땅위에 어떤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대로 이 죄악 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사망 권세 아래에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생명 곧 영생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하는 일이 빛을 비추는 일로 묘사가 된 것입니다.

      일곱 교회의 사자(계1:20)

      ‘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 하셨다 . 일곱 별은 곧 일곱 교회의 사자라 하셨다 .

      그러면 ‘ 일곱 교회의 사자 ’ 는 무엇인가 ?

      안내 : 부족한 종이 2009 촛대는 무엇입니까? 년도에 「 성경적 요한계시록 주석 」 을 정리할 때는 ‘ 일곱 별 곧 일곱 교회의 사자 ’ 에 대하여 ‘ 주의 종 ’ 이라 하였다 . 그랬는데 2015 년도에 ‘ 예수 그리스도의 천사 ’ 로 수정하였다 . 그리했으나 2020 년 10 월 26 일 현재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 일곱 별 곧 일곱 교회의 사자 ’ 에 대하여 ‘ 주의 종들 ’ 로 재수정 한다 .

      1. 일곱 별 곧 일곱 교회의 사자

      ( 계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 계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 계 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죄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 계 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 계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 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 계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일곱 교회의 사자는 곧 ❶ 에베소 교회의 사자 , ❷ 서머나 교회의 사자 , ❸ 버가모 교회의 사자 , ❹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 , ❺ 사데 교회의 사자 , ❻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 , ❼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이다 .

      2.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 계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 하셨다 . 그러면 ‘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 는 무엇인가 ?

      ( 엡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 혹은 선지자로 ,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 그가 혹은 사도로 , 혹은 선지자로 ,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 하셨다 . 주님께서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주의 종들을 세우셨다 . 이것이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시다 .

      3.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 고후 8: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촛대는 무엇입니까?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 하셨다 . 그러므로 우리 형제들 즉 주의 종들은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다 . 그렇기에 일곱 교회의 사자는 여러 교회의 사자들로서 주의 종들이다 .

      문 1: ‘ 일곱 교회의 사자 ’ 는 무엇인가 ?

      답 : 여러 교회의 사자들로서 주의 종들이다 .

      문 2: ‘ 주의 종들 ’ 은 무엇인가 ?

      답 : 주님께서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사도로 , 혹은 선지자로 ,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신 주의 종들이다 .

      (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 하셨다 .

      그러면 ‘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 는 무엇인가 ?

      그리고 ‘ 내 사자를 보내어 ’ 는 무엇인가 ?

      ( 계 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 하셨다 .

      그러므로 ‘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 는 곧 ‘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 이다 .

      촛대는 무엇입니까?

      · 성경구절 계 2:1~7 · 설교자 김경진 목사 · 예배일자 2019-10-27

      계 2:1~7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촛대는 무엇입니까?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한국 교회는 희망이 있는가?’ 이 질문은 제가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 친구들과 선후배들과 함께 학교 잔디밭에서, 혹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뜨겁게 나누던 주제였습니다. 배차 간격이 꽤 긴 버스를 여러 대 보내면서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친구들과 버스 정류장에서 토론하던 주제입니다. 당시는 그래도 교회가 크게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우리의 질문은 ‘한국 교회, 희망이 있는가?’라는 주제였습니다. 젊어서 그랬던 것일까요?
      그때 저는 주로 낙관적인 입장을 말하곤 했습니다. 커져만 가는 대형 교회를 바라보면서, 또 그 과정에서 불거지는 다양한 비관적인 문제를 목도하면서, 몇몇 목회자들의 타락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친구들에게, 늘 제가 알고 있는 훌륭한 교회 이야기와 훌륭한 목회자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습니다. 그때 제 아버지의 이야기가 저에게는 단골 메뉴였습니다. “아직도 한국 교회에는 훌륭한 목사님들이 많이 있어. 그러니 희망이 있지 않은가? 아직도 어떤 교회는 아름답고, 귀하고,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고 있어. 그러니 희망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제 30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제가 유학하며, 또 목회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역시 “한국 교회, 희망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저의 변증의 자료가 희박해져 감을 느낍니다. 옛날만 하더라도 여기저기 정말 좋은 목사님이 많이 계셨습니다. 좋은 교회에 대한 소문, 좋은 사례들도 참 많았습니다. 아마 지금도 어딘가에 그런 목사님들, 그런 교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시간이 갈수록 좋은 이야기, 좋은 소식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 희망이 있는 것입니까? 교회의 크고 작은 실수들이 한국 교회에 대한 실망을 형성합니다. 목회자의 욕심과 타락이 기독교에 대한 실망을 만들어 냅니다. 세상 사람들의 오해나 잘못된 정보가 교회에 대한 실망을 만듭니다. 우리 소망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 소망교회 때문에 실망한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교회를 개혁하는 주체로서 한국 교회를 바로 세우려는 목회자로 저 자신을 규정해 왔습니다. 작은 교회를 세워 10여 년 동안 목회했던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겨 왔습니다. 또 지금은 소망교회라는 큰 교회에서 목회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 소망교회에도 달라져야 할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달라져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젊은이들의 무관심거리로 전락해 버렸다는 점에서, 신학생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없는 부끄러운 유산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큰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타락한 중세교회를 개혁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워 간 개혁자들의 정신을 기리며, 바른 교회가 어떠한 교회인지,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날입니다. 타락했던 중세교회를 새롭게 하고 태어난 교회가 오늘의 개신교입니다. 바로 이 ‘개혁 교회’인데, 과연 오늘 우리가 정말 순결하고, 아름답고, 깨끗하며,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교회인가를 묻는다면, 촛대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쉽게 “네.”라고 답할 수 없을 처지에 놓였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구체적으로 열거하거나 나열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의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임을 인정합니다. 그렇게 열거하는 것조차 하나님께 죄스럽습니다.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타락한 모습, 부족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에 희망이 있습니까? 저는 오늘 이 시간에 “그렇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멋진 교회들과 목사님들을 꼽으면서 그렇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한국 교회에 희망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조차 희귀해져 버린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바라보지만, 이전보다 더 나빠진 것 같은 현실을 목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국 교회에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정의로우시며, 순결하시며, 사랑이 많으시며, 우리를 구속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으며, 그가 하늘에 오르셨을 때 성령을 통해 교회를 세우신 분, 곧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다시 세우시고, 고치시고, 지키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실수하는 인간이 주인이 아닙니다. 실수하는 교회가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루터와 칼뱅과 같은 이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다시 새롭게 하셨습니다. 저는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면서, 루터의 정신이나 칼뱅의 개혁 정신에 대해 먼저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여러분과 함께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종교개혁주일의 참다운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 자신의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지켜 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비록 교회들이 계속해서 타락해 가는 것처럼 보이고, 어디에도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한 치의 변함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지키시고, 당신의 성도들을 보전하시리라 믿습니다.

      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가 전파된 곳에서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복음이 들어간 곳마다 교회는 세워졌고, 박해를 받는 촛대는 무엇입니까? 곳에서도 견뎌내었으며, 지하로 숨어 들어가고, 카타콤으로 숨어 들어가면서도 교회는 건재했습니다.
      교회가 타락한 일들은 많았습니다. 끊임없이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교회들을 다시 세우시고, 또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입니다. 이 계시록 말씀은 1세기 말엽, 사도 요한이 복음을 증거하다 밧모섬에 갇혔을 때, 일곱 교회를 향해 보낸 편지 형식의 말씀입니다. 요한에게 에베소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내용이 촛대는 무엇입니까?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 2장 1절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요한계시록 2:1)
      여기서 일곱 별은 무엇이며, 일곱 금 촛대는 무엇입니까? 1장 20절입니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요한계시록 1:20)

      우리 주님께서 일곱 별을 붙잡고, 하나님의 사자들을 손에 붙잡고, 하나님의 일꾼들을 붙잡고, 하나님의 교회인 일곱 교회, 즉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며 말씀하신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뒤, 지금 하늘 보좌에 앉아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 나라에서도 오늘도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인 일곱 별을 붙잡고, 하나님의 교회인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면서 지금도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는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교회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 주님께서 교회를 지키시며, 우리 주님께서 교회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지금도 그렇게 일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의 흐름을 보면,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에베소, 두아디라, 버가모, 서머나,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총 일곱 교회입니다. 한결같은 패턴으로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이 이어질 때마다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이 모든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칭찬의 말씀과 더불어 이어지는 책망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 교회에 각각에 맞는 처방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어 이기는 자에게는 어떤 상을 주실지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에베소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패턴으로 이어집니다. 일곱 교회 이야기의 맨 마지막마다 등장하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요한계시록 3:6)

      우리 주님께서 일곱 금 촛대 사이 곧 일곱 교회 사이를 거니시면서, 즉 소망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 사이를 거니시면서, 일곱 별을 붙잡고, 주님의 사랑하는 종들을 붙잡고, 성령을 통해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도 있고, 저런 교회도 있습니다. 교회가 다양한 만큼 각자 다양한 문제도 가지고 있습니다. 완전한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각각 칭찬받을 만한 내용도 가지고 있습니다. 칭찬받을 만한 아름다운 교회가 있고, 책망받을 만한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는 여전히 도상에 있습니다. 과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완성체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은 주님의 손 아래 있습니다. 주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으며,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끊임없이 책망하시기도 하고, 교회를 향해 칭찬하시기도 합니다. 주님은 교회를 이끄시며 다스리고 계십니다.
      부족하다고 실망할 것도 없고, 잘했다고 자만할 일도 아닙니다. 자만했다면 또다시 쓰러질 것이고, 부족했으나 회개한다면 다시 일어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지도하심을 따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칭찬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잘했던 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통해 확인해 봅시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요한계시록 2:2~3)

      하나님은 에베소교회가 잘 하고 있던 일들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인내가 있었습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용기도 있었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지만 아닌 자들을 시험해 그들의 거짓됨을 드러낸 지혜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는 좋은 덕목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에베소교회에는 사도 바울이 3년 동안이나 귀하게 목회했던 교회입니다. 디모데가 목회했고, 후에는 사도 요한이 목회를 한 교회입니다. 아주 아름답게 성장해 온 교회였습니다. 귀한 말씀의 사역자들이 거쳐 간 교회였습니다. 열심 있는 교회였습니다. 신학적으로도 바르게 세워지려고 노력했던 교회입니다. 6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요한계시록 2:6)

      니골라당의 주장은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첫째, 복음의 시대이므로 이제 더 이상 율법은 필요 없다. 둘째, 육은 더럽고 영만이 선하다. 그러므로 셋째, 기독교인들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로 보존되므로 어떤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니골라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교회는 신학적으로 그 내용을 거부했습니다. 그와 같은 주장을 미워했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학적으로 바른 교회, 다른 사상을 가진 악한 자들을 걸러낼 수 있는 교회, 나름대로 아름다운 교회, 멋진 교회를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성령을 통해 그 교회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4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요한계시록 2:4)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신학적으로도 촛대는 무엇입니까? 건전했습니다. 인내도 있었습니다. 게으르지도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예배드리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좋은 말씀을 듣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성령을 통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교회를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권면은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요한계시록 2:5)

      이렇게 열심히, 나름대로 신학적으로 바르게 세워 가며, 많은 사람이 온전하게, 게으르지 않게,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있는 교회임에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첫사랑을 다시 회복하라. 처음 행위로 돌아가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네 촛대를 옮기겠다.” 교회의 교회 됨을, 교회가 교회 됨을 옮기겠다는 뜻입니다. “그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가 되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는 준엄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오늘 저는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면서 참담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과연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저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 칭찬받은 교회가 몇 교회나 됩니까? 하나님의 책망만 받은 교회는 얼마나 많습니까? 책망과 칭찬을 함께 받은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십시오. 하나도 제대로 된 것 같지 않은 교회들입니다.

      그리고 2000년이 흘렀습니다. 그럼에도 이 세계에 얼마나 많은 교회가 흩어졌습니까? 얼마나 많은 교회가 세워졌습니까? 오고 오는 세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교회로 성장한 교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고,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다시 새로워지며, 다시 세워졌기에, 교회는 다시 성장하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으며, 촛대는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저는 이런 다짐을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소망교회, 대형 교회입니다. 대형 교회인 만큼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여러 문제점도 많이 노출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이 문제들을 풀어보기를 원합니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식들, 때로는 원통하고 촛대는 무엇입니까? 억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소리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주시는 성령의 음성으로 듣고자 합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듣겠습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다시 찾아보겠습니다. 장로님들, 도와주십시오. 권사님들, 함께해 주십시오. 우리 성도 여러분, 함께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우리 소망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한국 땅에, 한국 교회에, 정말 희망을 줄 수 있는 교회로 다시 우뚝 설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문제들도 찾아보고, 해결책도 찾아보겠습니다. 오해가 있다면 소통하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사실 여러분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저 열심히 교회에 나오며,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저의 일이고, 교회의 일이며, 당회의 일이고, 직분자의 일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노력하며, 아름다운 교회를 함께 만들어 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러분과 함께하는 귀한 시간, 하나님께서 좋은 열매들을 넘치게 채워 주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촛대는 무엇입니까?

      ⓒ이진옥 사모(성경제일교회)

      "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요한계시록 1장 20절)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의 특성상 상징적인 언어가 많다. 그런 점에서 본문을 해석할 때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일곱 별'은 본문 스스로 '일곱 사자'라고 미리 말해주고 있다. 문제는 이 '일곱 천사'가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가이다. 따라서 촛대는 무엇입니까? 본 글은 '일곱 별'이 상징하는 '천사'의 실체가 무엇이며 그것이 요한계시록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간단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일곱 별'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1) 이 일곱 천사를 '목회자'로 보는 견해, (2) 교회를 보호하는 '수호천사'로 보는 견해, (3) 지상의 교회와 동일시되거나 대표되는 천상의 존재로 보는 견해로 정리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엔,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곱 천사를 '목회자'로 보는 견해는 한국교회에서 전통적인 해석인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사자'라는 단어가 구약에서 '메신저'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큰 고민 없이 받아들인 결과로 보인다. 특히, 이러한 점은 목회자의 권위를 주장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사자'가 '천사'라는 점과 '천사'가 복수인 것은 목회자 개인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무엇보다 최근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요한계시록 안에서 ‘천사’라는 단어가 사람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경우가 없다는 점에서 수용되지 않는 견해다.

      둘째, 교회를 보호하는 ‘수호천사’로 보는 견해다. 그러나 이 견해도 요한계시록 2-3장에서 각 교회마다 첫 머리말에 '~교회의 사자(천사)에게 편지하라'에서 수신자를 '수호천사' 볼 경우, 각 교회마다 주어진 회개와 경고가 '수호천사'에게 향하고 있다는 점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 각 교회의 수신자가 개인이 아니라 교회 전체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도 이 견해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셋째, 필자가 보기에 가장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일곱 천사'가 지상의 교회와 동일시되거나 대표되는 천상의 존재로 보는 견해이다. 그 이유는 우선 Beale에 의하면 '별'을 구약성경과 유대교 문헌에서 천사 대한 상징으로 사용된다. 또한 무엇보다 요한계시록 안에서 천사는 계시를 전달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독특하게 교회와 동일시되거나 대표되고 있다는 점이다. 두 구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는 요한계시록 19:10이다. 이 구절은 사도 요한이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할 때, 천사가 자신을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라고 밝히며 극구 사양한다. 이러한 점은 천사 스스로 사도 요한과 그의 공동체인 교회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구절은 요한계시록 8:3-4이다. 이 구절은 마지막 일곱째 인이 떼질 때, 천사가 모든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장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시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천사는 교회의 대표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중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곱 천사들'은 지상의 교회와 동일시되거나 대표되는 천상의 존재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결론적으로 '일곱 별'인 '일곱 교회의 천사들'은 지상에 있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동일시되거나 대표되는 천상의 대응체다. 이러한 점은 하나님의 교회가 지상에도 존재하지만 또한 동시에 천상에도 존재한다는 교회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사도요한의 독특한 관점인 것처럼 보인다.

      정리하면, '일곱 별'인 '일곱 교회의 천사들'은 개별적인 사람, 특히 목회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와 동일시되거나 대표되는 천상의 교회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요한계시록 안에서 그 당시 독자와 오늘 우리에게 두 가지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첫째, 예수님께서 교회를 철저하게 보호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촛대’(지상의 교회) 가운데 계신다(계 1:13). 또한, 예수님이 오른손으로 ‘일곱 별’(천상의 교회)을 붙들고 계신다(계 1:16). 이는 예수님이 교회를 자신의 주권으로 철저하게 보호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은 당시 로마의 핍박 가운데 있는 교회에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둘째, 교회는 결국 승리한다는 점이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하늘의 전쟁에서 패배한 사탄이 지상으로 쫓겨난다(9). 곧이어 사탄은 지상에 있는 교회를 핍박한다(13). 이 말은 하늘에서 쫓겨난 사탄이 지상의 교회는 공격할 수 있지만, 지상 교회의 대응체인 천상의 교회는 공격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로마의 핍박 속에서 지상의 교회는 현실적으로 몰락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천상의 교회는 이미 승리한 모습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교회들에게 믿음을 지키며 끝까지 인내하는 근거와 도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의 두 가지 점은 오늘 우리에게 세속화로 인한 교회의 타락과 공격에도 믿음으로 사는 이유와 소망을 던져준다.

      *이봉섭 목사는 주님을 닮아가는 작은 교회를 꿈꾼ㄴ 서로사랑교회 대표목사다. 총신대신대원을 졸업했고, 성경삶사역연구소(소장 이진섭 교수)가 운영하는 성경사역연합 사역위원으로 동역하고 있다. 교회 한 성도의 딸이 신천지에 빠졌던 관계로 신천지와 몇년간 싸움을 벌여왔다.

      제11과, 두 증인

      유대인들은 다 모아도 인구가 얼마되지 않지만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은 각 분야에서 뛰어나며 노벨상을 휩쓸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노벨 경제학상의 65%, 물리학상 의 32%, 의학상의 23%, 화학상의 11% 그리고 문학상의 7%는 유대인들에게 수여되었다. 유대인들은 무서운 고난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뛰어난 사람들을 배출하는가 하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연구 과제가 되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촛대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탁월한 것은 그들의 종교적 가정교육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중 에서도 유대인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성경을 읽는 것이 그들을 그렇게 뛰어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유대인 어머니는 아이들의 침대에서 성경을 읽어주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것이 아이들로 하여금 큰 꿈을 갖게 하고 건실한 삶을 살게 하며 언어에도 남다른 능력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야말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 제11장을 시작하며… 요한계시록 11장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 백성을 핍박하는 세력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을 예언하고 있다.

      1. 천사는 요한에게 무엇을 측량하라고 하였는가?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계 11:1).

      천사가 성전을 측량하라고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었다고 하였다. 요단강 계곡에서 자라는 이스라엘의 갈대는 길고 똑바로 크기 때문에 길이를 재는 자로 쓰기에 알맞았다. 천사는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고 하였다. 600여년 전에 에스겔도 이상 속에서 어떤 사람이 성전의 각 부분을 측량하는 것을 보았다(겔 40:3~43:12). 이 측량은 대속죄일에 있었다. 그리고 세 가지 것을 측량하였는데, 바로 성전(겔 40:3~43:12)과 제단(겔 43:13~17)과 사람들(겔 44:1~48:35)이었다. 요한계시록 11장 1~2절의 장면도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에스겔의 이상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에스겔의 이상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1장 1~2절이 예루살렘 성전을 자세히 살피라는 말 씀은 물론 아니다. 요한이 계시를 볼 당시에는 예루살렘의 성전 건물은 이미 파괴되어(A.`D. 70)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2. 얼마나 오랫동안 이방인들은 거룩한 성을 짓밟을 것인가?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2).

      요한은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는 말을 들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전 밖 마당은 성전의 구조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뜰이었다. 이방인들은 여기까지밖에 들어갈 수 없었다. 따라서 이방인들은 심판하지도 말고 혹은 인치지도 말고 그냥 두라는 말씀이 된다.

      재림 전 심판은 구원 얻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다. 이방인들은 원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곳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성전 뜰에 있는 이방인들이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참된 이스라엘은 되지 못하여 이교의 습관을 그대로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바로 그들이 마흔두 달 동안이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 즉 하나님의 신실한 성도들을 박해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렇다면 성전 마당에 거하면서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이나 짓밟을 존재는 도대체 누구일 것인가?

      우선 성경 예언에서 마흔두 달이 어떤 기간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흔두 달, 1260일, 한 때 두 때 반 때에 대한 일곱 번의 성경상 기록

      1. 다니엘서 7장 25절 :한 때, 두 때, 반 때

      2. 다니엘서 12장 7절 :한 때, 두 때, 반 때

      3. 요한계시록 11장 2절 :마흔두 달

      4. 요한계시록 11장 3절 :일천이백육십 일

      5. 요한계시록 12장 6절 :일천이백육십 일

      6. 요한계시록 12장 14절 :한 때, 두 때, 반 때

      7. 요한계시록 13장 5절 :마흔두 달

      * 한 때는 한 해를 의미 :12달 × 30일 = 360일

      * 두 때는 두 해를 의미 :24달 × 30일 = 720일

      * 반 때는 반 년을 의미 : 6달 × 30일 = 180일

      42달 = 1260일

      요한계시록은 마흔두 달과 일천이백 육십 일과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표현을 모두 다 사용하여 그것이 같은 기간을 말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기간은 거룩한 성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교회가 심각하게 고통을 당하는 기간으로 성경에 자주 나오므로 실제적인 1260일, 즉 삼 년 반의 기간일 리는 없다. 기원 후 2000년의 역사에서 겨우 삼년 반을 가지고 성경이 그렇게 비중있게 다룰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예언적인 기간으로 계산하여야 한다. 성경에서 예언상 하루는 일 년(민 14:34`;`겔 4:6)으로 계산하므로 마흔두 달 즉 일천이백육십 일은 1260년이 된다.

      그렇다면 126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성도들을 괴롭히며 짓밟은 존재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우리는 몇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이 존재는 한 사람일 리가 없다. 한 사람이 그렇게 긴 기간 동안 성도를 핍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존재는 분명히 역사에 등장하 는 세력이어야 한다. 1260년이란 기간은 긴 기간이기 때문에 숨어서 그 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셋째로, 성전 밖 마당에 있으면서 그 일을 하였으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종교적인 세력일 것이고 그렇게 긴 기간동안 핍박을 할 수 있었으니 정치적인 권력도 가진 존재일 것이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 세력을 역사에서 찾아낼 수 있다. 1260년(A.D. 538~1798)동안이나 계속된 중세의 긴 암흑시대 동안 누가 세상의 권력보다 더 강한 힘을 행사하며 성도들을 파문하고 종교 재판에 회부하고 화형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는가? 그것은 중세 로마 교황권의 부정적인 측면이었다. 요한 바오로2세도 로마 교황권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죄한 일이 있다. 오죽하면 역사가들이 그 시대를 암흑시대라고 부르겠는가? 1260년동안 성도들을 짓밟을 이 세력의 정체와 성격에 대하여는 요한계시 록 13장에 자세히 다시 언급되기 때문에 13장에서 다시 연구하기로 한다.

      3. 두 증인은 무엇이며 그들은 1260년 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계 11:3,4).

      성도들이 1260년 동안 시달림을 받을 때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한 두 증인은 누구일까? 본문은 두 증인이 이 땅에서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밝혔다. 두 감람나무와 촛대는 구약 성경 스가랴 4장에 나오는 장면이다. 스가랴가 두 감람나무의 뜻을 묻자 천사는“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라고 알려준다. 두 증인은 사람들이 아님이 분명하다. 1260년의 긴 기간 동안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1260일을 1260년 동안 성도들이 박해를 당한 기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한 두 증인은 사람일 리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1260년을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굵은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슬픔과 회개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1260년의 박해 기간 동안 성도들의 고난을 슬퍼하며 세상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회개를 호소해 온 어떤 것일 것이다. 두 증인은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했는데 감람나무와 촛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둘 다 불을 밝히는 것이다. 감람나무는 불을 밝히는 기름을 대주는 원천이 되고 촛대는 그 기름으로 불을 밝힌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1260년의 암흑 기간 동안에 감람나무와 촛대처럼 계속해서 불을 밝히는 기름을 대주는 동시에 또 불을 밝혀 빛을 비추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어두움을 밝혀주는 등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이“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 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성경은 어두운 중세의 박해시절 그 어두움을 비추는 등이요 빛이었던 것이다.

      두 증인이라고 한 것이 신구약 성경을 잘 상징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노래했으며 예수께서는“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요 5:39)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 말씀, 즉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다.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중세의 암흑 시대 동안 성경 말씀은 그들과 함께 슬퍼했으며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증인이었으며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 다음 절을 보면 더 명확해진다.

      4. 두 증인을 해하려 하는 자는 어떻게 되는가? 또 그들에게는 어떤 권세가 있었는가?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촛대는 무엇입니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계 11:5~6).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한다 는 것과“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한다는 표현은 엘리야의 기사들을 연상시킨다.

      엘리야가 기도한즉 이스라엘에 삼 년 반 동안이나 비가오지 않았으며(약 5:17), 엘리야를 죽이려 하던 군사들은 촛대는 무엇입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그들을 소멸하였다(왕하 1:10). 물이 변하여 피가 되게 한다는 것은 모세가 나일강물이 피가 되게 했던 애굽의 재앙을 생각나게 한다. 실제로 모세와 엘리야는 증인으로서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말씀을 나눈 일도 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모세나 엘리야를 감람나무나 촛대로 부른 일은 없다. 또 그들은 사람이기 때문에 1260년의 긴 기간 동안 증인이 될 수도 없었다. 비가 오지 않거나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이 임한 것은 그들이 모세나 엘리야 같은“사람”을 거절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믿음의 조상들은 구약의 증인에 포함되며 신약의 모든 성도들은 신약의 증인들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신구약 성경이 해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재앙을 내린 일 이 있었는가? 요한계시록 22장 18절은“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 여 호와는 그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소멸하는 불이시”(신 4:24)다.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해하려 하는 시도는 실패하였고 재앙을 가져왔다. 오늘날 우리도 하

      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불순종하면 재앙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편리한 대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5. 두 증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계 11:7~10).

      하나님의 말씀이 1260년의 증거를 마칠때 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 즉 사단의 세력이 성경을 핍박하여 죽은 것처럼 만들 것이다. 성경이 그렇게 박해를 당한 장소를 큰 성이라 했다. 그것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과 반대되는 개념이며 바벨론 성이다(계 18:2).
      그 당시에 실제적인 바벨론이나 베벨론으로 불리던 로마는 이미 없었으므로 큰 성은 바벨론처럼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한 나라 나 집단을 의미할 것이다.

      이곳은 또한 영적인 소돔 혹은 애굽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소돔은 타락의 온상을 대표하는 이름이며 애굽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인하는 무신론을 대 표한다. 이런 곳이야말로 예수께서 영적으로 못 박히신 곳이다.

      그렇다면 1260년의 박해 시대가 1798년에 끝나니, 그 기간이 끝나갈 무렵에 성경에 나올 만큼 대대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성경을 핍박한 세 력이 역사상에 있었는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할 만큼 교회와 신앙을 미워하고 박해한 세력과 시대가 있었는가? 분명히 있었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 부분을 역사적으로 혹은 실제의 사실로 해석하기를 주저하지만 상징적으 로만 해석할 경우 사흘 반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이 문제가 된다.

      프랑스 혁명은 불과 몇년 동안 계속된 사건에 불과하지만 세계사적으로 교회사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뚜렷한 영향을 남겼다.

      그러므로 성경 예언이 이 사건을 취급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은 외관상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일어난 무산 계급의 혁명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무신론 사상을 유포시키고 공산주의를 태동하게 한 기틀을 마련해 소련과 동유럽 그리고 중국의 수십억 인구를 공산주의와 무신론의 틀 속에 가두어서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큰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프랑스는 종교 개혁을 거부하고 부패와 타락이 극도에 달했다. 성직자들은 귀족 계급이 되어 온갖 사치와 향락를 누렸으며 일반 백성들은 압제에 눌려 신음하고 하루 먹을 빵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1789년 7월 14일 분노한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혁명은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동안 왕과 교회에 억눌렸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하여 새로운 달력을 만들어 종교적인 제일들을 모두 없애버렸으며 일주일을 10일 제도로 만들어 예배일도 철폐하였다. 분노한 시민들은 교회를 더럽히고 성직자들을 모독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혁명 기간에 약 5,000명의 성직자들이 처형을 당했다.

      11월 10일에는 이성의 여신을 상징하는 젊은 여인이 선택되어 노틀담 사원에서 경배를 받았다. 프랑스 혁명 의회는 1793년 11월 26일 성경과 종교 행사 금지령을 공식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였다는 예언이 슬프게도 성취되었다.

      그러나 주일 제도가 철폐되고 성경 읽는 것이 금지되며 하나님 대신 이성의 여신이 받들어지자 프랑스는 최악의 무질서와 혼란에 빠져 들어갔다. 범 죄는 증가하고 국민들의 건강은 땅에 떨어졌고 사회는 공포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할 수 없이 프랑스는 삼 년 반 후인 1797년 7월 17일 성경 및 종교행사 금지령을 폐지하였다.

      6. 삼일 반이 지난 후 어떤 기적이 일어났는가?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계 11:11~12).

      프랑스 혁명 정부는 성경을 금지한 후에 급속도로 사회가 혼란에 빠 지자 할 수 없이 삼 년 반 만에 그 조치를 철회하였다. 그리고 죽은 것처럼 보였던 두 증인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1798년 2월 15일 프랑스 군인들이 로마의 시스티네(Sistine Chapel) 성당에 난입하여 교황을 유배 보내고 교황이 그곳에서 죽자 538년부터 1260년 동안이나 계속되던 교황의 세력은 드디어 약화되고 성경은 생기를 얻은 것처럼 보급되고 읽혀지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제지업과 인쇄술이 발달하여 성경을 비싸지 않게 출판하게 되었고 1804년에 영국성서공회, 1816년에는 미국 성서공회가 설립되어 성경을 대량으로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전 세계에 파견되었다. 실로 19세기는 위대한 선교의 시대였다.

      성경은 오늘날도 베스트셀러 중의 베스트셀러이다. 신구약 성경은 매년 수백 개의 언어로 출판되며 쪽 복음 성경은 1,0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보급되고 있다. 대한성서공회의 발표에 의하면 한국의 성서공회는 우리나라에서 2005년 1년 동안에 170만 권의 성경을 발행하였고 1,678,259부의 성경을 77개 언어로 제작하여 85개국에 보내고 있다. 실로 엄청난 성경의 부활이다.

      7. 두 증인을 죽이려했던 곳과 사람들은 어떤 피해를 당했는가?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계 11:13).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직접 생기를 얻어 부활했지만 성경을 박해한 프랑스는 커다란 영적 지진을 경험하였다. 그들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주를 잃고 피폐해졌으며 엄청난 무너짐을 경험하였다.

      성 십분의 일이란 유럽 열(十) 나라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프랑스를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죽은 사람이 칠 천이라는 것은 아마도 혁명 기간 동안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상징적 수라고 생각된다.

      이런 격변을 겪고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과 말씀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 벌어지는 참담한 결과들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하나 님을 두려워하고 영광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8. 세 번째 화, 즉 일곱째 나팔을 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계 11:14~18).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셋째 화가 시작되 기 전 하늘에서 큰 음성들이 나서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과 그리스도께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실 것을 찬송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셋째 화가 이 세상 역사의 끝임을 알게 된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 앞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의 찬양이 시작된다.

      그들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최고의 존경을 드린다. 하나님은“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하나님,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는 분”이시다. 늘 함께 나왔던“장차 오실 이”라는 구절이 여기에는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아 일곱째 나팔은 분명히 마지막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은 또한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와 마지막 심판의 때에 있을 일 을 요약하여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이방들이 분노할 것이다. 복음을 거절하며 살아온 그들은 그들에게 내리는 심판과 재앙이 성도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핍박하며 죽이려 할 것이다. 전세계적인 분노와 핍박이 성도들에게 쏟아질 것이다.

      그 때 드디어 주의 분노가 이 땅에 내릴 것이다. 오래 참으셨던 은혜의 시기는 끝날 것이다. 이 땅에 내릴 주의 분노는 일곱 재앙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계15~16장). 그 때는 죽은 자들도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심판의 때를 가 리키는 말씀이다. 재림하신 후 천 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다시 이 땅에 내려온다(계 21장). 그 때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다부활하여 마지막 심판을 받을 것이다(계 20:7~15).

      그 때에 그의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실 것이다. 이제 아름답게 재창조된 이 땅과 새 예루살렘 성이 그들의 거처가 된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온 그들에게는 무궁한 기쁨과 영생이 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이 때는 또한“땅을 망 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 이다. 악인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저항을 시도하지만 마침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그들을 소멸하게 된다. 마침내 모든 죄악의 역사는 완전히 끝난다. 우주에는 다시 사랑과 기쁨만이 가득 차게 된다.

      9. 하늘 성전의 모습은 어떠하였는가?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계 11:19).

      모든 구원의 역사가 마치는 이 때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며 언약궤가 보이고 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이 들어 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며 살아왔다. 심지어 자칭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십계명을 등한히 여겼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넷째 계명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 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거룩한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하나의 계명을 어기면 모두 범한 것과 같다는 것(약 2:10)을 그들은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그 모든 불순종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은혜의 시기는 끝나고 이 세상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은 이 세상에 임할 엄숙한 재앙과 심판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감사하는 것은 성전이나 계명이나 심지어는 심판까지도 그 근본 정신은 사랑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명상할 문제

      오늘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 하나님이 계신 것이 분명한 것처럼, 이 죄악 세상의 역사가 끝나고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도 확실하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아무리 박해를 당하고 거절을 당해도 언제나 승리한다. 그것은 역사가 증거한다.
      그러나 그 성경 말씀을 거절하는 세력이나 개인은 마침내 구원의 길에서 떠나게 된다. 그 운명의 날, 우리가 어느 편에 서 있을 것인지 오늘 결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우리의 생명은 언제 끝날지 모르며 세상의 마지막도 “생각지 않은 때”(마 24:44)에 청천벽력처럼 우리에게 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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