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상인

마지막 업데이트: 2022년 7월 21일 | 0개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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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여행지

9일 오스카 트로피 거머쥔 봉준호 감독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미국 영화 아카데미(오스카) 작품상, 감독상 등을 휩쓸며 4관왕에오르자 프랑스 언론과 영화계에서도 찬탄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영화 강국을 자임하는 프랑스는 작년 자국의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봉 감독에게 안긴 나라로, 특히 '기생충'이 영어가 아닌 언어로 된 영화로서는 최초로 오스카 작품상을 거머쥔 것에 부러움 섞인 시선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의 권위지 르 몽드는 10일(현지시간) '오스카 4개 부문 석권: 봉준호 '기생충'의 승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박스오피스에서 '조커'에 한참 못 미치는 결과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가 (작품상을) 수상했다"면서 "반면에 프랑스 영화나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는 수상에 실패했다"고 전했다.

르 몽드는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는 9일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오스카 시상식의 위대한 승자"라고 평가했다.

신문은 특히 작년 5월 프랑스 칸 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봉 감독이 수상한 것을 언급하며 "대부분이 미국인인 6천여명의 영화산업 종사자들의 선택으로 이뤄지는 오스카상이 칸 영화제의 심사위원단의 선택과 일치한 것은 1955년 이후 처음"이라고 전했다.

미국의 델버트 맨 감독이 로맨틱 코미디물 '마티'로 1955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1956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석권했다. 그에 앞서서는 미국의 빌리 와일더 감독의 '잃어버린 주말'이 1946년 오스카 작품상과 칸 최고상을 수상한 바 있다.

프랑스 언론은 특히 영화가 탄생한 나라이자 영화 강국을 자임하는 자국의 영화가 한번도 차지하지 못한 오스카 작품상이라는 영화계 최고의 영예가 한국 영화에 돌아간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유력 일간지 르 피가로는 '오스카: 기생충, 봉준호 현상이 영화의 역사를 뒤엎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92년 역사상 최초로 미국 영화아카데미가 작품상을 비영어권 작품에 선사했다"면서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 수상작이 오스카 외국어영화상까지 가져갔다.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전했다.

영화, 텔레비전 방송 등 영상 작품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프랑스의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인 '알로씨네'는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은 92회 오스카 시상식의 위대한 승자로, 4개 부문을 가져갔다"면서 "잭팟"이라고 전했다.

프랑스의 영화전문지 '프르미에'도 봉 감독의 4관왕 수상 직후 트위터에서 "믿기 어려운 일"이라면서 "오스카와 아시아 영화인 봉준호에게 모두 역사적인 밤이다. 전례가 없는,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순간"이라고 전했다.

프랑스의 영화정보사이트 시네세리닷컴도 트위터에서 "기생충이 오스카 작품상을 가져갔다. 영어 외의 언어로 된 영화가 이 상을 받은 것은 최초"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프랑스 칸 영화제 측도 공식 트위터 친애하는 상인 계정을 통해 "기생충이 델버트 맨의 '마티'와 빌리 와일더의 '잃어버린 주말'에 이어 황금종려상과 오스카 작품상을 석권한 역대 세 번째 영화"라면서 "친애하는 봉준호, 칸 영화의 모든 스태프가 진심으로 브라보를 전한다"고 했다.

프랑스 언론과 영화계는 또한 올해 아카데미에 출품된 자국 영화 네 편이 모두 수상에 실패한 것에 참담한 심경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공영 프랑스 TV는 온라인판에서 "프랑스 영화 네 작품이 오스카 경쟁부문에 출품됐지만 단 한 작품도 수상하지 못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면서 "프랑스의 낙담"이라고 표현했다.

이번 오스카에 프랑스 영화는 기대를 모았던 라주 리 감독의 '레미제라블'이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제레미 클라팽 감독의 '내 몸을 잃었어요'가 애니메이션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되는 등 총 4편이 경쟁부문에 올랐지만, 모두 고배를 마셨다.

프랑스 TV는 그나마 프랑스 출신 시각효과 전문가인 기욤 로쉐롱이 샘 멘데스 감독의 영화 '1917'에 합류해 이번에 오스카 시각효과상을 수상한 것이 그나마 작은 성과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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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빛을! - 2백주년 주교단 사목교서 전문 7

신분과 계급의 차이 뛰어넘어
참으로 한형제로 살자는 운동

발행일 | 1984-02-05 [제1391호, 4면]

11, 선교 2백주년에 우리가 이같이 순교정신을 본받고자 하는 것은 순교정신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또는 교회를 확장하여 이 땅에서 큰 세력의 종교단체를 이룩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안됩니다.

그것은 이미 집적 간접 언급한데서 잘 드러나듯이 우리 스스로 그분들이 사셨고 또 목숨바쳐 증거한 그 믿음의 사랑을 이 시대에 이 사회 속에서 살기 위해서이고 또한 그럼으로써 우리사회와 우리겨레를 그 믿음과 사랑으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물질만능과 가치관의 혼돈으로 말미암아 방향감각을 잃고 어두움에 잠긴 이 사회에 구원의 빛을 밝히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의 순교선열들은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 역사의 주재자, 모든 생명의 원천, 모든 진리와 정의와 정의의 원천, 모든 사랑의 원천으로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뜻, 그분의 진리 그분의 정의, 그분의 사랑을 모두가 깨닫고 살 때에 개인의 구원 뿐 아니라 사회와 겨레의 친애하는 상인 구원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현세질서 역시 여기에 입각할 때에 바로 서고 나라가 발전하고 번영과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선열들이 이 믿음을 통하여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 인간소명의 고귀함과 인생의 의미였습니다.친애하는 상인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현세가톨릭만을 추구하고 현세몰락만을 추구하고 있던 당시에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속된 인간은 현세를 넘어 영원을 위해 있다는 것을 깊이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신분이나 계급, 빈부의 친애하는 상인 차이를 넘어서 모두가 존엄하고 평등하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와 품위를 지녔음을 확신했읍니다.

당시의 우리사회는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존경받는 때가 아니었읍니다. 인간은 신분과 계급으로 구분되었고 이에 따라 그 대접도 달랐으며 뿐더러 인간의 친애하는 상인 존재 가치까지 달랐습니다.

양반과 상인의 분별은 엄격하였고 선로 간에는 상하관계 이상의 관계가 있을수 없었으며, 노비와 천민은 주인과 양반들로부터 받는 천시와 인간이하의 취급을 나서부터 죽기까지 숙명으로 알고 감내해야 했습니다.

바로 이런 사회풍조 속에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깨닫고 또한 이를 실생활에서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는 인종의 차별 자유인이나 노예의 차별, 남녀의 차별을 넘어 모두가 하나이고, (갈라3·28)모두가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형제임을 깊이 인식했습니다. 그러기에 신자들 사이에서는 신분이나 계급을 떠나서 참으로 친형제 같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유교적 전통 가치관에서 볼 때에는 반란이요 혁명이었습니다.

또한 당시의 우리사회에서는 지배계급의 권력의 횡포와 탐관오리의 부정부패가 극심한 때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은 일반국민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 하느님의 사랑속에서만이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분들은 나라의 공직에 있는 사람은 백성을 위해서 있어야하며 결코 그 반대가 아님을 확신했습니다. 또한 아무리 나라의 법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고 양심에 위배될 때에는 이를 지킬 의무가 없을 뿐아니라 이는 악법으로서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펴는 천주교를 비록 나라에서는 사교로 단정하고 이를 어기는 신자들을 국사법으로 다루어 극형에 처했지만 이법에 순응치 않고 오히려 용감히 그 법에 의해 처형될 것을 알면서도 묵숨을 바쳐 믿음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선열들은 박해자를 미워하거나 그들을 원수같이 생각한 일은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그들이 과오를 깨우치고 회개하기위해 말로써 권할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진리를 위해 정의를 위해 또한 사랑과 평화를 위해 순교한분들이 우리 순교선열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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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은 7월30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연중 제17주일 삼종기도 가르침을 통해 주님을 찾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마태오 복음 13장에 나오는 일곱 개의 비유를 예수님의 비유사화라고 일컫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세 개의 비슷한 비유를 통해 이 비유사화를 끝맺습니다. 곧 보물의 비유(44절)와 진주 상인의 비유(45-46절), 그리고 그물의 비유(47-48절)입니다.

보물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아버리려는 친애하는 상인 주인공들의 결심을 강조하는 처음 두 비유에 대해 잠시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경우는 일하던 밭에 숨겨진 보물을 우연히 발견한 농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기 소유의 밭이 아니기 때문에 보물을 소유하려면 그 밭을 사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특별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가진 것을 다 팔아버리는 모험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는 진주 상인을 만나게 됩니다. 좋은 진주를 알아볼 줄 아는 전문가였던 그는 큰 가치를 지닌 진주를 가려냈습니다. 그 또한 그 진주를 얻기 위해 가지고 있던 다른 모든 진주를 팔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비유들은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에 관한 두 가지 특징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곧, 찾음과 희생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된 선물이자, 은총이지만, 은쟁반에 담아 사용할 수 있게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동성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 찾아야 하고 걸어야 하며, 할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찾는 태도는 발견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소중한 보물, 곧 예수님의 인격 안에 존재하는 하느님 나라에 도달하려는 열망으로 불타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숨겨진 보물이요, 큰 가치를 지닌 진주이십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의미로 가득 채워주시고 삶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주시는 근본적인 발견이십니다.

예기치 못했던 발견 앞에서 농부 뿐 아니라 진주 상인도 놓칠 수 없는 유일한 기회를 맞이했기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팔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보물의 평가할 수 없을 만큼 큰 가치는 희생, 포기, 단념까지 포함하는 결정을 내리게 만듭니다.친애하는 상인

보물과 진주를 발견했을 때 다시 말해서 주님을 발견했을 때, 이 발견을 무위로 끝내지 않고 이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머지를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종속시키고 그분을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은총을 첫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본질적인 것이 결핍된 사람이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오로지 주님만 주실 수 있는 충만한 기쁨을 찾은 사람입니다. 치유된 병자의 기쁨, 용서받은 죄인의 기쁨, 자기 앞에 천국 문이 열린 도둑의 복음적 기쁨입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 전체를 가득 채워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 슬픔, 내적 공허,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새로 생겨납니다.(『복음의 기쁨』, 1항 참조)

오늘 우리는 비유에 나오는 농부와 진주 상인의 기쁨을 관상하도록 권고 받습니다. 우리 삶에서 위로하시는 예수님의 존재와 가까이 계심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 각자가 느끼는 기쁨입니다.

그분의 현존은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주고 형제들, 특히 가장 연약한 형제들의 필요에 마음을 열고 그들을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 나라의 보물, 다시 말해서 성부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발견한 기쁨을, 일상의 말과 행동으로써 증거할 수 있도록 동정녀 마리아의 전구를 통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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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이슬람인 우대 정책 관직에 집까지 제공
“델리는 아랍인들 몰려드는 문명 세계의 중심지”

중국인들 인도 불교 성지로 순례 델리 궁정 찾아온 중국 사신단 기록도
중국 황제 “인도에 절 짓고 싶다” 제의

델리의 쿠툽 미나르. 이슬람 제국시대가 델리에 남긴 대표적 유산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델리의 쿠툽 미나르. 이슬람 제국시대가 델리에 남긴 대표적 유산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븐 바투타(1304~1368 혹은 1369)가 인도 땅에 도착한 건 1333년 9월 중순이었다. 모로코의 이 여행자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을 거쳐 오늘날 파키스탄 땅인 신드에 내려섰다. 당시 북인도의 지배자는 델리 술탄 왕국의 무함마드 빈 투글룩이었다. 이븐 바투타가 국경을 넘자, 무함마드 빈 투글룩 술탄의 국경 관리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국경 관리는 이븐 바투타의 용모와 옷차림, 동행자와 시종, 심부름꾼 수, 데려온 가축의 수, 거동과 자리에 앉을 때의 의례 등 모든 행동에 대해 상세하게 묻고 관찰했다. 관리는 이슬람권의 동쪽 끝인 모로코의 탕헤르에서 온 이 서른 살 된 남자에 대한 서면 보고서를 작성, 역참을 이용해 수도 델리로 파발을 띄웠다.

이븐 바투타는 신드에서 델리의 술탄에게 바칠 물품을 구입했다. 술탄에게 바칠 말과 낙타 30마리와 기타 물품을 이라크 상인으로부터 샀다. 돈은 신드의 상인에게 빌렸다. 델리의 술탄은 물품을 받으면 몇 배로 보상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상인들은 그걸 잘 알기 때문에 국경지대에 있다가 델리를 향해 떠나는 외국인에게 돈을 기꺼이 빌려준다. 이븐 바투타도 수천디나르를 빌렸다. 그건 이븐 바투타 시대, 약삭빠른 인도 상인이 돈을 버는 상술이었다.

신드 지방의 대도시 물탄에 가자 세관 직원이 나와, 이븐 바투타의 동행인들 중 상인에게는 휴대 물품의 4분의 1을 관세로 요구했다. 관리들은 이븐 바투타에게 입국 목적을 물었다. 당시 델리 왕국은 이민을 목적으로 국경에 도착한 사람에게만 입국을 허가했다. 이븐 바투타는 인도 입국을 위해, 살러왔다고 말을 해야 했다. 그러자 법관과 공증인까지 데려와 관련 문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이를 거부하는 이븐 바투타의 동료 중 일부는 입국이 불허됐다.

이로써 중세의 가장 유명한 세계 여행가 중 한 명인 이븐 바투타의 인도 생활 9년이 시작됐다. 이븐 바투타 이전에 델리에 들어간 사람이 적지 않았으나, 그가 남긴 인도 여행기는 단연 발군이었다. 이븐 바투타의 책 ‘여행기’를 통해 친애하는 상인 이슬람권의 동쪽 끝 나라 인도의 막대한 부와 자세한 생활상이 알려지게 됐다. 이 여행가 덕택에 우리는 인도의 수도 델리의 14세기 초반 모습과, 델리의 이전 역사를 접할 수 있다. 이븐 바투타보다 조금 앞서 동방여행에 나섰던 베네치아인 마르코 폴로(1254~1324)는 주로 중국 관련 기술로 유명하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 시대 중국을 잘 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븐 바투타는 비슷한 시기에 인도를, 마르코 폴로는 중국 이야기를 지중해 세계에 알린 셈이 된다.

델리 술탄 행렬 땐 화포로 금전 쏘아

이븐 바투타가 찾은 델리는 이슬람 왕국이었다. 북인도에 최초의 이슬람 제국이 델리를 수도로 해서 들어선 게 1206년이었다. 아프가니스탄 도시 가즈니의 통치자가 북인도를 정벌하고, 그의 장군에게 이곳을 통치하도록 했다. 델리 지사는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주군이 죽자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역사상 ‘델리 술탄 시대’라고 불리는 시기의 시작이다. 델리 술탄 시대는 5개 왕조가 319년 동안 각기 길고 짧은 역사를 만들어갔고, 1527년 바부르가 세운 친애하는 상인 무굴에 멸망했다. 이븐 바투타가 델리에 들어갔을 때는 델리 술탄 시대의 세 번째 왕조인 ‘투글룩 왕조’ 시대였고, 당시 통치자는 이 왕조의 두 번째 임금 무함마드 빈 투글룩이었다.

이븐 바투타는 14세기 초반 자신의 눈으로 본 델리에 대해 “중요하고도 웅장한 도시로서 아름다움과 든든함을 겸비하고 있다. 이곳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유례가 없는 성벽이 있다. 델리는 인도뿐만 아니라 동방 이슬람에서도 가장 큰 도시로서 부지가 넓고 건물도 많다”고 ‘여행기’에 적었다.

델리의 술탄이 가진 부(富)에 이븐 바투타는 감탄했다. 그가 전하는 술탄의 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은 이렇다. “술탄의 행렬이 지나가는 성문부터 궁문까지 이어지는 거리의 벽은 온통 비단으로 장식한다. 비단을 깔아 그 위를 술탄 행렬이 밟고 지나간다. 행렬 앞에는 수천 명의 노예 보병이 걸어가고 뒤에는 수많은 사람과 군사가 따라간다. 언젠가 술탄이 수도로 돌아오는 걸 봤는데, 코끼리 부대에 3~4문의 화포를 싣고 가면서 환영 인파를 향해 금전과 은전을 마구 쏘아대니 사람들은 그걸 줍느라고 야단법석이었다. 성에 들어와서부터 궁전에 이르기까지 내내 이렇게 했다.”

이븐 바투타는 전설도 한 가지 소개한다. 무함마드 술탄의 아버지 기아숫딘 투글룩 술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수조 하나를 만들어놓고는 거기에 금 한 덩어리를 통째로 녹여 부었다고 한다.”

지방의 지사들이 군주에게 바치는 진상품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이븐 바투타는 “주지사들이 예물이나 세금으로 모은 재물을 헌상할 때는 금은제 대야나 주전자 같은 기명을 제작하기도 하고, 금이나 은으로 벽돌 같은 친애하는 상인 덩어리를 만들어 통째로 헌상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군대 지휘관·궁정 관리에 외국인 임명

술탄의 외부 행렬은 화려했다. 명절 아침 술탄을 위해 16마리의 코끼리가 준비됐다. 코끼리는 비단과 금, 보석으로 단장되어 있고, 술탄 전용으로 누구도 타지 않았다. 코끼리의 등에는 보석을 박은 비단으로 만든 일산(日傘)이 꽂혀 있는데, 일산대는 순금으로 만들었다. 코끼리마다 보석을 박은 비단 방석이 놓여 있고, 술탄은 그중 한 마리를 골라 탔다.

이븐 바투타는 인도 술탄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도착하자마자 큰돈(6000탄카카)과 가구가 완비된 편안한 집을 제공받았다. 술탄은 배경이 불분명한 이븐 바투타를 왕궁의 법관(말리크 법학파)으로 임명하고, 연 1만2000디나르의 수입이 나오는 식읍 3개를 하사했다. 술탄은 아랍인들을 몹시 좋아하고 존중했으며, 그들의 뛰어남을 친애하는 상인 인정하였다.

이븐 바투타가 무함마드 빈 투글룩 술탄을 만난 건, 인도에 들어간 뒤 해가 바뀐 1334년 6월 8일이었다. 무함마드 술탄은 페르시아어로 이븐 바투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온 건 매우 경사입니다. 당신에게 자비와 은고를 베풀 것입니다. 당신네 나라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곳을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이븐 바투타는 술탄의 손에 일곱 번이나 입을 맞춰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술탄은 페르시아어 외에 아랍어도 할 줄 알았다. 술탄은 아랍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아랍인을 ‘주인’이라고 높여 부르기도 했다.

이븐 바투타는 무함마드 빈 투글룩 술탄이 군대 지휘관은 물론 궁정 관리의 대부분을 외국인으로 임명했다고 전하고 있다. 술탄은 외국인을 ‘낯선 사람’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고, ‘친애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게 했다. 이븐 바투타와 비슷한 시기에 델리 술탄 왕국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남긴 인도의 시인이자 역사가인 이사미(?~1350?)도 아랍인과 이슬람인을 우대했던 델리 술탄에 대해 전하고 있다. 이사미는 저서 ‘푸투후스 살라틴’(Futuh-us-Salatin·1349~1350년작)에서 아랍인과 다른 외국인들이 ‘촛불 주변의 나방처럼’ 델리로 모여들었다고 쓰고 있다.

4개의 도시가 합쳐진 델리

이슬람 왕이 이슬람 세계에서 오는 인재를 후대했다는 건 당시 북인도 내 정세를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무함마드 빈 투글룩 술탄 시대보다 약 9년 전 통치자이자 델리 술탄 왕조기의 위대한 군주 중 한 사람인 알라웃딘 칼지 술탄(재위 1296~1316)도 외국인을 중용한 측면에선 마찬가지였다. 인도의 무슬림 역사학자 굴람 사르와르 칸 니아지(Ghulam Sarwar Khan Niazi)는 저서 ‘알라웃딘 칼지 술탄의 삶과 일’(1921년작)에서 “이슬람권은 선진 문명과 선진 군사 기술을 힘으로 북인도를 정복했으나, 인구의 절대 다수인 힌두 국민을 통치하고, 주변의 힌두 왕국을 제압하기는 쉽지 않았다. 델리의 술탄은 이로 친애하는 상인 인해 많은 무슬림 학자나 이슬람 교도들이 자신의 제국으로 와서 자신의 제국 통치를 돕기를 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적고 있다.

“알라웃딘 칼지 술탄은 문학의 위대한 후원자였고, 다른 미술 발전에 상당한 추동력을 제공했다. 알라웃딘 술탄의 재위기에 사람들이 본 가장 놀라운 일은 모든 나라 국적이고 과학자와 전문가들 엄청난 수가 술탄 주변에 몰렸다는 점이라고 우리는 바라니로부터 듣고 있다. 수도인 델리는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바그다드에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카이로의 경쟁자가, 콘스탄티노플과는 같았다. 이들은 문명 세계의 중심지이다.”

이븐 바투타는 황궁 외에도 델리의 여러 건축물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늘날도 델리의 최대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쿠툽 미나르 유물 지역을 그도 방문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쿠툽 미나르는 거대한 이슬람 첨탑과, 그 옆의 이슬람 사원 건물로 유명하다. 지금 대사원 건물은 많이 무너졌으나, 옆에 있는 72.5m 높이의 붉은 사암으로 된 첨탑은 700년 전 여행자가 보았던 때나 다름없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이븐 바투타는 코끼리 세 마리가 나란히 탑의 계단을 걸어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크다고 적고 있다. 필자도 델리에 살 때 쿠툽 미나르 지역에 자주 갔고, 이후 여행 갈 때도 한번씩 들른다.

델리의 도시 구조에 대해 이븐 바투타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14세기 당시 델리는 4개의 도시가 붙어서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제일 오래된 도시는 이슬람 시대 도래 전 델리에 있던 힌두 왕국이 건설한 옛도시 델리가 친애하는 상인 있다.(이곳에는 오늘날 랄 콧 Lal Kot이라는 성곽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이후 이슬람 지배자들이 세운 세 개의 도시, 즉 시리(Siri), 투글루카바드, 자한바나흐가 들어서 있다고 했다. 이들 4개의 옛 성곽 도시의 건물들은 지금은 모두 폐허다. 그중에서 투글루카바드는 엄청난 길이(28㎞)의 성곽 일부가 남아있으며 그 옆에 그 성곽 도시를 지은 왕 기아숫딘 투글룩의 아름다운 무덤 건물은 지금도 잘 보존돼 21세기 관광객을 즐겁게 하고 있다.

궁정 관리 부패 만연 “임금 10% 착복”

델리에 들어선 네 번째 도시 ‘투글루카바드’의 술탄 무덤. 이븐 바투타가 인도에서 주군으로 모신 술탄이 이곳에 누워 있다.

델리에 들어선 네 번째 도시 ‘투글루카바드’의 술탄 무덤. 이븐 바투타가 인도에서 주군으로 모신 술탄이 이곳에 누워 있다.

이븐 바투타는 14세기 당시 인도 델리 왕실 관리의 부패에 대해서도 재밌는 언급을 남겨 놓고 있다. 그는 연봉으로 1만2000디나르를 받았는데 인도 궁정의 관리들은 급여를 10%를 떼고 준다고 했다. 이븐 바투타는 “술탄이 누구에게 얼마를 지불하라고 하면 통상 1할은 깎는다. 예컨대 10만디나르라고 하면 9만디나르를, 1만디나르라고 하면 9000디나르만 지불한다”고 적고 있다.

델리의 궁정에는 중국 황제가 보낸 사신이 찾아오기도 했다. 남인도의 바닷길을 통해 도착한 사신 규모는 적어도 15명쯤 되고, 그들의 시종은 100명쯤이었다. 시기는 1342년 초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 황제의 이름을 이븐 바투타는 책 ‘여행기’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연대기를 따져 보면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혜종(재위 1333~1370)이다.

중국 황제가 델리의 술탄에게 어떤 선물을 보내왔는지도 우리는 이븐 바투타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100명의 노비와 500필의 공단, 사향 5맛누, 보석을 박은 비단옷 5벌, 수놓은 화살통 5개, 칼 5자루 등을 보내왔다. 중국 황제는 한 가지 요청을 해왔다. 중국인들의 순례지인 카라질 지역에 불교 사찰을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왔다. 무함마드 빈 투글룩 술탄은 ‘우상 묘당’이라고만 표현했으나, 북인도에 불교 성지가 있는 걸 볼 때 불교 사원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무슬림인 인도 술탄은 이같은 요청에 대해 무슬림 땅에서는 인두세를 납부해야만 (이교도의) 사찰 건립이 허용된다. 이런 세를 낼 용의가 있다면 건립을 허용하겠다”는 회신을 작성했다.

이븐 바투타가 델리의 술탄 곁을 떠날 수 있었던 건 바로 중국 사신 때문이었다. 술탄은 답례 차원에서 사신을 중국에 보내기로 하고, 이븐 바투타를 특사로 임명했다. 무함마드 빈 투글룩 술탄은 이븐 바투타의 특사 임명 이유에 대해 “당신이 여행과 유람을 즐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술탄이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답례품 목록도 우리는 이븐 바투타를 통해 알 수 있다. 선물 목록은 길고 화려했다. 안장과 굴레까지 갖춘 말 100필, 노예 100명, 춤추는 힌두 여자 노예 100명, 값비싼 비르미야 면포 100필, 오색 비단옷 100벌, 솰라히야라는 옷 104벌, 쉬린 바프 천 100필, 샨 바프 천 100필, 다섯 가지 색으로 100필씩 융직 500필, 오스만산(産) 아마 천 100필, 모전 100개, 대형천막 1기, 돔 6기, 금제 촛대 4개, 은제 쪽빛 촛대 6개, 금제 주전자가 딸린 금제 대야 4개, 은제 대야 6개, 수놓은 술탄의 옷 10벌, 보석을 박은 술탄의 머릿수건 10개, 보석을 박고 수놓은 화살통 10개, 칼집에만 보석을 박은 칼 10자루, 보석을 박은 장갑 한 켤레, 남자 노비 15명 등…. 중국 황제가 보내온 선물보다 훨씬 많고 값비싸다.

마르코 폴로 여행기보다 높은 평가

1342년 7월 22일이었다. 이븐 바투타는 성대한 환송식을 치르고 중국으로 출발했다. 인도 땅에 들어온 지 8년10개월이 지났다. 이븐 바투타는 병력 1000명의 호위를 받으며, 배를 타고 떠날 남인도 항구 캘리컷을 향해 떠났다. 하지만 델리에서 약 130㎞ 떨어진 지점에서 힌두 반군의 공격을 받아 그는 일행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반군 규모는 1000명의 기병과 3000명의 보병이었다. 그는 반군에 포로로 붙들렸다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났다. 이쯤해서 그는 술탄에게 상황을 친애하는 상인 보고하고 델리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천생 여행객인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남인도로 내려가 동방세계의 끝인 중국을 목표로 여행을 계속한다. 그리고 인도를 떠나기 전 남인도 서해안의 당시 사정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남인도의 대표적 무역항 중 하나인 캘리컷에 가보고는 “세계 방방곡곡의 상인들이 모여든다. 세계적으로 큰 항구 중 하나다. 중국과 자바, 예멘, 페르시아에서도 온다”고 감탄했다. 이곳의 지배자는 힌두 왕이며, 상권은 바레인 출신의 아랍인이 잡고 있고, 숱한 선박을 보유하고 중국·예멘·페르시아와 교역을 하는 선박왕이 있다는 이야기도 이븐 바투타는 전한다. 그는 이 항구에는 중국 선박 13척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큰 중국 선박에는 1000명이 승선한다며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븐 바투타는 델리에서 자신과 함께 떠났던 중국 황제의 사신을 남인도에서 만났다. 이들은 조난당했으나 중국 상인의 도움을 받아 귀국하였다고 그는 말한다. 이븐 바투타는 이후 몰디브와 스리랑카, 벵골만, 미얀마, 인도네시아 자바섬, 말레이시아, 필리핀을 거쳐 중국까지 갔다. 중국에서 다시 바닷길로 인도까지 돌아왔고, 그곳에서 바로 아라비아해를 가로질러 고향인 모로코를 향해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21세기의 한국에도 인도 수도 델리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책은 한 권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700년 전 모로코의 이 여행자가 남긴 델리와 인도에 대한 자세한 기록에 후세인은 감탄할 뿐이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비슷한 시기에 동방 여행을 한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보다 높이 평가받는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은 ‘카더라’가 적지 않은 데 반해, 이븐 바투타는 직접 경험한 일을 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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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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